4. 도쿄를 걷다, 그리고 집

우리의 여행 일정은 도쿄에서의 하룻밤이 포함되었는데, 엄마가 일본에 가 본 적이 없었기도 했고 비행기 표 가격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나도 일본 여행은 여러 번 가봤지만 도쿄는 처음이라 나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도쿄의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엄마와 내가 감기에 심하게 걸린 탓도 있었을 것이다.

공항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내린 우리는 거대한 캐리어를 질질 끌며 전철을 타고, 또 걸어서 숙소를 찾아갔다. 프라하에서 걸린 지독한 감기 때문에 콧물은 줄줄 흘렀고 정신은 몽롱한 상태였다. 게다가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면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워 꿀잠을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체크인이 3시부터 가능하단다.

지금 10시인데….? 결국 호텔에 짐을 맡기고 근처를 돌아다녔으나 온통 빌딩숲에 샐러리맨 뿐이었고 근처의 작은 신사 하나 구경하고 나가떨어졌다. 감기도 감기인데, 풍경이 온통 회색 빛에 굳은 얼굴로 정장을 입고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밖에 없으니 기분은 점점 우울해 졌다. 마치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와 엄마만 일 안하고 노는 이방인인 느낌.

지친 우리는 스타벅스를 찾아 들어가 네시간을 꾸벅꾸벅 졸며 버텼다. 카페도 죄다 흡연할 수가 있어서 담배냄새에 계속 시달렸다.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편의점에서 구글번역기를 써 가며 감기약도 사 보았는데 영 효과가 없는 듯 했다. 2시 반쯤 되었을 때, 우리는 호텔로 돌아갔고 겨우 방을 배정받아 쉴 수 있었다. 쓰러져서 기절한 듯 잠을 자다가 밤이 되어서야 좀비처럼 일어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고는 다시 쓰러지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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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의 둘째 날 아침. 엄마는 잠을 잘 못 잤다고 했다. 계속 코가 막히고 목이 너무 아파 깼다 잠들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 혼자 잘 잔 것 같아 미안했다. 감기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혔다. 여태껏 살면서 걸린 감기 중에 제일 괴로웠다. 그 동안의 감기가 길고 가늘었다면, 이번에 우리가 걸린 감기는 굵고 짧았다. 침대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인데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엄마는 나를 끌고 나갔다. 어제 도쿄의 삭막한 풍격에 큰 충격을 받은 우리는 그나마 심신이 쉴 수 있을만한 신주쿠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인터넷에서 뒤진, 효과가 엄청나다는 감기약도 사서 먹었다. 무지하게 썼다.

신주쿠 공원은 엄청 크고 예뻤다. 단풍이 아롱아롱 지어 있어 가을 느낌이 물씬 났다. 엄마와 나는 사이 좋게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수시로 벤치에 앉아 꾸벅 꾸벅 졸다가 걷다가를 반복했다. 어제보단 나름 기분이 좋았다. 회색 빌딩과 담배냄새로 점철된 첫인상이 조금은 흐려졌다.

그리고 우리는 쇼핑을 하고 쉴 요량으로 시내의 돈키호테를 찾아 갔으나, 우리 호텔 근처의 약국보다 비싼 가격에 놀라 도망 나왔다. 여담인데, 역시 성진국이라 불리는 일본답게 각종 성인용품이 화장품 사이에 슬쩍 섞여 있더라. 민망해라! 호텔 근처의 약국에서 쇼핑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짐 정리를 했다.

도쿄에 있었던 시간이 제일 짧았는데, 기념품은 제일 많았다. 어찌어찌 가방에 우겨 넣고 눈여겨 본 라멘집에서 저녁을 해결하러 갔다. 라멘은 생각보다 감동이 덜했고, 그냥 먹을 만 한 정도였는데, 엄마가 했던 말이 너무 웃기다. 일본 특유의 그 달달한 간장 맛이 너무 싫다며 질린다고 했다. 차라리 런던에서 물리도록 먹은 샌드위치가 낫다고. 감기에 걸려서 더 그랬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호텔로 돌아왔다. 원래 일본 음식 좋아하는데, 도쿄는 유난히 별로였던 도시였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무난하고 무사하게 한국으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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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의 후기.

글을 쓰며 느낀 것은, 그 도시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대부분 밤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밤이 사람이 가장 감정적으로 예민해 지는 시간이라서 그런 걸까, 유독 낮의 기억은 희미한데 밤의 기억은 선명했다. 런던의 비에 젖은 밤 골목, 바르셀로나의 바닷바람이 불어오던 따뜻한 밤, 프라하의 따뜻한 와인을 호호 불며 언 손을 녹이던 밤.

여행을 다녀오면서 새삼 구글의 위대함을 느꼈다. 사실 구글 지도가 없었다면 여행은 몇십 배 더 험난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아예 불가능했을지도. 구글, 사랑합니다. 한국에서의 서비스가 시급하다. 어떤 버스가 어떤 정류장을 지나고, 몇 분 후에 도착하는 지까지 섬세하게 알려주는 구글, 당신은 대체….

사실 엄마는 영어를 잘 하는 편이 아닌데, 사람들은 엄마가 연장자처럼 보여서인지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걸면, 엄마는 허허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제서야 허둥대며 대답하는 일이 계속 있었다. 언어 때문에 내가 많은 일을 책임지고 해야 했는데 이 일이 힘들었다기 보다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내가 어느새 이만큼 컸구나, 마냥 커 보이는 엄마를 따라잡았구나. 그래서 더 열심히 알아보고 물어보며 다녔다. 묘한 뿌듯함과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엄마와 함께 한 여행은 즐거웠다.

나에게 이 유럽 여행은 힘들 때 꺼내보는 부적 같은 기억이다. 그만큼 환상적이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엄마랑 함께 갔다 왔다는 사실이 그 특별함에 의미를 더했다. 15일 남짓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내게 큰 변화는 없었다. 나와 엄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뭔가의 불씨가 되었다. 언젠가 또 엄마랑 둘이 유럽을 갈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더 커다랗고 능숙하겠지? 그런 날이 올 것을 손꼽아 기다릴 거다. 여행은 아무리 다녀도 또 가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

*** The End ***

관련 글: 유럽을 듣다 – 1엄마랑 가자 – 1유럽을 듣다 – 2엄마랑 가자 – 2유럽을 듣다 – 3엄마랑 가자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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