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프라하를 걷다

사실 프라하에 대해선 별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아빠가 프라하로 출장을 다녀 왔는데 너무 좋았다며 강력하게 추천했고, 유럽 여행을 빨리 끝마치기 아쉬워 겸사겸사 끼워 넣은 곳이었다. 바르셀로나 공항 시스템은 너무 복잡했고,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고, 아침에 정성스레 싼 샌드위치를 담배냄새 맡으며 입에 우겨넣고 프라하 행 비행기에 올랐다.

밤이라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한 프라하. 우리나라에선 프라하 돈을 환전해주는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시내로 나가서 환전을 한 뒤 숙소를 찾아 떠났다. 따뜻한 바닷가였던 바르셀로나에 있다가 프라하로 오니 얼마나 춥던지… 바르셀로나에서의 옷차림으로 왔던 우리는 금새 후회하며 길 한가운데에서 캐리어를 뒤져 겨울 옷을 꺼내 입었다.

그렇게 캐리어를 끌고 강을 따라 한참을 걸어 도착한 숙소. 생각보다 숙소는 매우 예쁘고 안락했다! 커다란 창문 앞에는 앉거나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쿠션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자 프라하의 아름다운 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숙소에서 짐을 내려놓고 한 숨 돌린 뒤 저녁을 먹으러 올드타운스퀘어로 향했다.

올드타운스퀘어광장에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대한 트리가 광장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었고, 광장은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가판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흥겨운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크리스마스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먼저 허기를 해결한 뒤 광장은 천천히 구경하기로 했다. 배는 고프고 돈 개념이 없어 일단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앉았는데 알고 보니 관광지의 정점에 있는 식당이라 매우 비쌌다. 광장을 구경하겠다고 굳이 야외 테이블에 앉았는데, 춥지 말라고 엄청 두꺼운 담요와 히터가 구비되어 있었다. 프라하는 맥주지! 외치며 맥주를 시켜 마셨는데, 곧이어 몰려오는 엄청난 추위에 금방 후회가 몰려왔다.

배를 채우고 나자 진짜 미친듯이 추웠다. 나는 추위를 그나마 덜 타는 편인데, 추위를 심하게 타는 엄마는 더 괴로웠을 거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덜덜 떨면서 광장을 둘러보다가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사람들이 너도 나도 들고 다니는 뜨거운 와인을 먹어보자 했다. 광장을 메운 수많은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손에 정체 모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액체가 들어 있는 종이컵을 들고 있었는데 근처를 둘러보니 뜨거운 와인을 파는 가게가 여러 곳 있었다.

뜨거운 와인이라니. 그 맛이 상상도 안가고 이미 배도 불렀지만, 너무 추웠기 때문에 한 잔을 사고, 술을 못하는 엄마는 뜨거운 사과 주스를 샀다. 뜨거운 와인은 정말 신세계였다. 나중에 찾아 보니 와인에 계피, 설탕 등을 넣고 끓여 낸 음료라는데 한 모금 목으로 넘기자 마자 온 몸이 따끈하게 데워 지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홀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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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뜨거운 와인과 사과주스를 각각 들고 홀짝거리며 엄마와 나는 크리스마스 마켓들을 구경했다. 가게들의 대부분은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파는 가게였다. 가게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플리마켓 형식의 가판대들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들 사이에서 예쁘게 빛나는 트리 장식들과 심혈을 기울여 트리 장식을 고르는 사람들, 뜨거운 와인을 홀짝대며 수다를 떠는 노부부, 젊은이들, 흥겹게 울려 퍼지는 캐롤, 아이들의 웃음소리. 미치도록 추웠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느꼈던 크리스마스 문화를 온몸으로 느낀 날이었다.

프라하에서의 둘째 날. 내일 새벽에 비행기를 타러 떠나야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마지막 날인 셈이었다. 사실 프라하는 어디서 뭘 해야 할지 미리 조사해온 것이 없어, 아침부터 인터넷을 뒤지며 갈 곳을 찾았다. 그렇게 엄마와 내가 뒤져 정한 곳은 프라하 성과 하벨시장. 프라하 성은 우리 숙소에서 강만 건너면 됐기 때문에 호텔 조식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프라하 성으로 출발했다.

프라하 성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침 햇살이 비추는 마을이었다. 프라하 성을 가려면 잔디밭이 깔리고 야트막한 집들이 늘어 선 마을 같은 곳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곳은 딱 내가 상상하던 유럽의 이미지와 같았다. 내리쬐는 햇살, 빨간 지붕에 흰 벽을 가진 집들, 파란 하늘과 초록빛 잔디. 너무 아름다운 광경에 계속 셔터를 눌렀다.

마을을 지나 프라하 성의 벽을 따라 계속 산을 올랐다. 프라하 성은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리처럼 성을 보러 온 관광객이 꽤 보였다. 헉헉대며 계단을 꽤 오르자 발 아래로 프라하 시내의 모습이 펼쳐졌다. 아침이라 그런지 안개가 살짝 내려앉아 있었는데,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치 늙은 조각가가 온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모양내고 다듬은 듯 했다. 경치에 감탄하며 길을 오르자 어느새 입구에 도착했다. 무섭게 생긴 경비병들이 우리의 가방을 검사했고, 통과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뒤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중세 RPG 게임을 보면, 성벽 안에 마을이 있고 그 가운데에 큰 성이 있잖은가? 마치 그런 모양이었다. 성벽을 통과하고 작은 건물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골목골목에 정취가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가 구경할 수 있는 골목은 한정적이었다. 나머지 막힌 구간은 돈을 지불하면 볼 수 있었는데, 그 가격이 꽤 비싸 그냥 훑어보는 데에만 만족해야 했다.

이리저리 난 길을 따라 계속 걷자 뻥 뚫린 광장이 나왔는데, 그 광장의 끝에 프라하 성이 위치해 있었다. 성은 진짜 어마무시하게 크고 높았다. 광장의 끝으로 가도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성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웠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너무 인상 깊은 건축물을 많이 봐서인지 큰 감흥은 없었다. 엄마랑 사진을 찍고 노닥거리다가, 반대쪽으로 빠져나가 강을 건너 하벨 시장에 가 보기로 했다.

길을 한참을 헤메어서 결국 나가는 데에 성공한 우리는, 프라하 성 옆에 딸린 광활한 공원을 걷고, 작은 나무 다리도 건너며 길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의 한 나무에는 그네가 걸려 있었는데, 그 그네에 타서 몸을 흔들자 프라하 시내가 내 발 밑에 있었다. 마치 프라하 위를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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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내가 번갈아가며 그네를 타 보고, 길을 내려가 강을 건넜다. 강에는 어젯밤에 보지 못한 새들이 가득했다. 백조, 기러기, 비둘기, 이름 모를 오리들이 바글거렸다. 그리고 강가에서 한 모녀가 새들에게 빵을 뜯어주고 있었는데, 빨간 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채 아장거리며 백조에게 손을 뻗는 아이는 기러기보다도 작아 보였다. 너무 예쁘고 귀여운 풍경이라 우리도 얼른 내려가 가방 속에 묵혀 둔 샌드위치 쪼가리들을 줘 보았다. 빵은 금세 동이 났고 더 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새들을 피해 우린 쫓기듯 도망쳐 시내로 향했다.

구글 지도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하벨 시장은 정말 볼 것이 없었다.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죄다 어디선가 본 듯한, 메이드인 차이나가 붙어있을 것만 같은 물건들이었다. 어젯 밤 크리스마스 플리마켓이 너무 예뻤던 탓도 있을 것이다. 크게 실망한 우리는 어제의 그 플리마켓이 열린 올드타운스퀘어광장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었다.

낮의 트리와 플리마켓은 또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흥에 미쳐 날뛰던 사람들은 없었고, 아이들과 관광객이 더 많아졌다. 우리는 그곳에서 걸쭉하고 뜨거운 돼지고기 수프와 뜨거운 와인, 그리고 커다란 핫도그를 사서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식사를 했다. 서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이 곳곳에 있었지만, 발이 너무 아파 잠깐이라도 앉아있고 싶었다. 돼지고기 수프는 신기하게도 감자탕 맛이 났고, 뜨거운 육즙이 줄줄 흐르던 핫도그는 과연 맛있었다.

뜨거운 와인이 든 종이컵으로 차갑게 식은 손을 데우고 나서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엔 정처 없이 걸었다. 그냥 지나가면서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들어가 보자고 했다. 프라하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유리 공예품이 유명해서, 곳곳에 마리오네트 인형을 파는 가게나 자그마한 유리 공예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물건들이 참 많았지만 대부분 관광객을 타겟으로 삼는 듯 했고, 실제로 한국말로 우리를 부르던 아저씨도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가게를 지나치고 마침내 한 커다란 인형가게를 발견했는데, 전통이 깊어 보이는 가게였다. 들어가자 마자 퀄리티가 남다른 인형들이 잔뜩 걸려있었고, 2층에는 좀 더 팬시한 느낌의 인형들이 있었다. 1층에 있는 인형들은 정말 매니아가 모을 듯한 모습으로 모두 다른 얼굴에 다른 옷을 입고 있었고, 가격 또한 어마어마했다. 우린 2층의 계단 천장에 매달린 새 인형이 마음에 들었고, 그 친구를 데려오기로 했다. 그 팰리컨 인형은 지금 우리 집 거실을 장식중이다.

역시 쇼핑은 피곤함을 잊게 하고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한다. 오직 발로만 이동하며 곳곳을 쏘다녔고 수많은 가게를 들락거렸다. 어느새 해는 저버리고, 가로등엔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으로 본 유리 세공품 가게에 들어가 기념품을 챙기기로 했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작은 문어와 이런저런 동물들을 산 뒤 아빠가 추천한 프라하 맛집으로 갔다.

역시 우리는 호갱이 맞았다. 첫날 올드타운스퀘어 광장의 반값에 더 맛있고 푸짐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필스너우르겔 생맥주와 고기를 주문해 놓고 한시간이 넘도록 수다를 떨며 기분 좋은 식사를 했다. 가게 앞에 줄이 생긴 것을 보고 우리는 얼른 가게를 나왔다.

마지막으로 숙소 가는 길의 올드타운스퀘어 광장을 한번 더 훑은 뒤,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갔다. 새벽에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혹시 조식을 싸줄 수 있냐고 부탁한 뒤에 얼른 짐을 챙겼다. 따뜻한 바르셀로나에서 추운 프라하로 넘어와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방은 히터를 틀어놔서 너무 건조했다. 감기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유럽에서의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

프라하에서의 셋째 날 새벽, 우리는 호텔에서 챙겨 준 조식 도시락을 들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휑하고 어딘가 모르게 삭막한 공항에서 호텔에서 싸 준 도시락을 봤는데 세상에…어마무시하게 많이 싸 줬다. 기껏해야 샌드위치 하나일 줄 알았는데 한사람당 샌드위치 두개에 귤, 음료가 가득했다.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고, 음식을 버리기는 너무 아깝고. 그 차가운 의자에 앉아 음식들을 입안에 쑤셔 넣는데 엄마가 정말 고마운데 체할 것 같다며 울며 웃었다. 급하게 음식을 처리하고 탑승수속을 마친 뒤 도장을 받고, 보딩하는 곳에서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갑자기 엄마가 비행기표가 없어졌다고 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그랬으니, 엄마는 더 놀랐을 것이다. 게다가 프라하에서 출발해 영국에서 경유하고 도쿄로 가고, 도쿄에서 다시 서울로 가는 복잡한 루트였고 그 표를 한꺼번에 받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했다. 어디서 흘린 건 아닌지 여러 번 길을 다시 훑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도장 찍는 아저씨에게 준 것이 마지막 기억이라 했고, 그 얘기를 듣고 그리로 찾아갔으나 아저씨는 엄마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안 된다며 돌아가라고만 했고, 비행기 시간은 임박해 오니 손에서 땀이 줄줄 났다. 엄마도 엄청나게 패닉 상태였다.

그러다가 마지막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보딩하는 곳에 대기하고 있는 승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무심한 눈빛으로 표를 다시 뽑아 줬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힘이 탁 풀렸다.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다행이라고 되뇌이며 비행기에 올라 피곤한 눈을 감았다.

*** 3편 끝 –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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