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가자!”

휴학 후 초심과 달리 엿가락처럼 늘어진 큰아이에게 제안했다. 휴학하면 하고 싶은 많은 것들 중에 배낭여행이 있었지만 실천하자니 내일이 오늘 같아 굳이 오늘 계획할 이유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는 꼴을 보려니 비행기 표는 비싸진다고 하지 그럼 숙박도 여의치 않을 거 같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입이 먼저 저지르게 내버려뒀다.

딸아이 반응은 좋았다. 케잌을 어떻게 예쁘게 썰까? 망설이던 와중에 숟갈로 떠먹은 격이다. 나도 울 큰애도 계획 형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둘이 다른 건 난 걱정형인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고3같은 고2시절을 보내는 우리나라 입시제도속에서 고분 분투하는 둘째와 동물농장에나 나올법한 숫자를 보유한 동물들. 여기는 양평. 남편의 출근길은 멀고 먼 여행길-학교에 등교시키고 출근을 하려면-또는 아이에게 뭔 일이 생기면 날쌔게 올 수 없는 거리.

개들 밥은 어찌 어찌 주고. 아이 옷은 어떻게 빨고. 밥은 어떻게 해 먹고. 아 또! 고양이 밥주기 화장실 치우기 거북이 밥 등 하루하루 보이는 데로 입력을 시켜놓고 출발일이 되었다. 남편이 비행기 표 예매를 해주고 호텔도 예약을 해 줬다. 딸아이만 가면 알아서 하게 놔 둘 텐데 내가 간다니 특별 신경 써서 예약을 해 줬단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대신 대리만족 시켜줄 이 몸이 호사 아닌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남편 동행 없이 해외 간일은 결혼 후 한 번도 없다. 기회가 아예 없었겠냐만 간다고 결정하면 따라 올 빈자리를 채울 방안 모색에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고 신경도 안 썼다. 내 눈에 얘들이 보여야 맘이 놓이고 남편이 있어야 한쪽을 담당해 준다는 조합에 익숙해진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다 맡기고 떠나자. 게다가 고등학교때부터 떨어져 있어 함께 있고 싶었던 큰딸하고 같이 가는데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가? 딸하고 엄마하고. 큰 딸이 미드 홀릭으로 영어실력을 늘려 놨으니 언어 문제는 덕을 볼 테고. 뭐 돈 떨어지면 카드로 긋고 나중에 감당하면 될 테고. 그렇게 생각하고 학원일 집안일을 빈자리 티 안 나게 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 도착하면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출발하는 여행객들의 설레임이 느껴진다. 이런 설레임을 좋아하는 둘째에게 미안한 마음과 남편의 걱정으로 배웅 받으며 우린 무계획으로 무작정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타러 제시간에 공항에 가고 잠자러 호텔가고 그러다 보면 무사히 인천공항으로 다시 오겠지. 비행기하고 호텔하고 예약하면 뭐 여행의 반은 끝난거라고 걱정하지 말라던 남편. 아마도 무계획으로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우리 모녀를 보며 본인이 더 걱정이 돼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처럼 들렸다.

런던 행 비행기를 타고서야 남편이 읽으라던 런던 여행서를 펼쳤다. 큰애는 몇 군데를 구글 지도에 꽂아 놨다. 사실 미리 계획을 하려 해도 가서 구경을 하는데 몇 시간이 걸릴지 가는 시간이 어느 정도 될지 가늠이 되지 않으니 그게 쉽지 않다. 나 빠져나온 공간걱정하기도 머리가 아팠던 나는 내가 갈 곳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었다가 비행기 안에서 펼쳐보니 별로 답이 없었다. 당장 음료수는 뭘 먹을지…그리고 기내식은 뭘 먹어야 할지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 때문에. 시크한 영국항공 직원들의 서비스를 받으니 비행기 안에서부터 영국냄새가 조금씩 나는 게 이제 정말 한국 뜨나보다 싶어 걱정이 현실로 다가왔다.

오전 11시경 출발한 비행기가 영국시간 2시 20분에 도착했다. 각 나라별로 공항과 숙소 이동방법은 딸아이가 좀 알아봐 놨다. 영국에 내려서 알아본 데로 오이스터카드를 끊으려고 하는데 기계가 안 보여 찾기 시작. 찾았다고 했는데 알아봤던 방법과 다르다. 늘 계획 데로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건 삶의 시간에서 터득한 터. 당황한 큰 아이를 다독이며 물어보자고 했다. 물론 그 말은 “네가 물어봐” 라는 뜻인데 우리 큰애는 검색이 먼저다.

검색하는 동안 못 참고 안내에 가서 물어봤다. 일단 내 질문을 알아는 들은 듯. 그런데 대답을 이해 못하겠다.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다시 설명해 준다. 뭐 아래로 내려가라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거기 기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 다음이 이해가 안 간다. 난 순간 당황. 아이를 불렀다. 아이의 표정이 별로 안 좋다. 눈치 빠른 안내자가 다시 아이에게 설명해 준다. 큰애가 알았다고 했다. 정말 알아들었나? 하여간 독특한 억양에 못 알아들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아래로 내려오니 어색하게 차려진 부스안 불친절한 아저씨에게서 카드를 구입할 수 있었다.

LondonRain

이눈치 저눈치 보며 오르락 내리락 지하철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컴컴해서야 호텔 근처역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오려니 공사하는 중인 입구와 내리는 비에 퇴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왼쪽? 오른쪽? 어디로 가야 할지 핸폰을 이리저리 돌리며 방향을 잡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이 생긴 할아버지가 어디를 가냐며 묻더니 따라오란다. 휀칠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우린 깔끔하고 아늑하지만 작고 치약 없는 호텔방에 무사히 들어갔다. 1차 잠자는 호텔 도착- 미션 클리어!

배도 채우고 치약도 사야하고 다시 밖에 나오니 치약 파는 가게는 닫았고 샌드위치 파는 가게는 아직 열려 있었다. 저녁과 내일 아침거리까지 사가지고 나오며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 돌바닥에 비가 고이고 나란히 붙어 있는 벽돌집에서 나오는 불빛이 빗물에 반짝이는 촉촉한 느낌이 예쁘고 이국적이다.

내일을 위해 방에 들어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여행의 첫날을 이야기 하며 낄낄 거리다 가족과 톡하고 설레던 영국의 첫날밤을 마감했다.

LondonStreet.jpg

영국에서의 기억은 2층 빨간버스, 넓고 듬성듬성 커다란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공원,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도로, 그리고 샌드위치, 도로 주위로 쭉 붙어있는 고풍스런 모습의 건물들, 그걸 그데로 유지하며 리 모델링 하는 가게들, 하지만 거기도 등장하는 현대식 디자인의 건물들, 곳곳에 자리잡은 크고 작은 동상들, 아침에 예쁜 길거리 꽃가게에서 파는 색색이 우아한 꽃들, 누가 사나 했더니 아침에 샀을 거 같은 꽃다발이 동상 앞 곳곳에 놓여있다. 11월 영국은 단풍진 한국의 흐린 날씨와 닮았고 간간이 보이는 햇살과 떨어진 낙엽들과 습습한 공기와 가끔식 불어오는 센바람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어우러져 쓸쓸해 보이지만 기분 좋은 풍경을 느끼게 해준다.

거기도 박물관에 가면 장소에 따라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삼삼오오 짝지어 뭔가를 열심히 적고 선생님들은 열심히 설명하고 애들 체크하고 그 와중에 무리에 못 어울리는 학생은 혼자 멀찌기 떨어져 따라 다닌다. 얘네들도 고달픈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학생만 그렇겠나? 다양한 모습의 학생들을 보니 집에 두고 온 둘째가 생각난다.

다음에 언니랑 와서 꼭 뮤지컬~ 봐라. 큰 아이가 1순위로 꼽은 장발장 공연을 난 어떨 결에 봤는데 내용이야 대충 알지만 하나도 못 알아듣는 대사와 노래를 듣고도 눈물이 나더라. 한국에 특별한 장소에서나 연중행사로 볼 수 있는 수준의 뮤지컬을 여기는 이렇게 곳곳에서 계속 상영한다니 뮤지컬만 보러 런던을 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극장은 어떨지 궁금하다. 쟝발장을 공연하는 극장은 들어가니 의자가 일렬로 죽 붙어있다. 가운데 자리는 중간에 화장실등문제로 나가려면 이만 저만 민폐가 아니겠다 싶은데 사람들은 익숙한지 서로 서로 잘 일어나고 잘 나가고 그 와중에 브레이크 타임에 맥주에 와인까지 들고 들어와 마신다.

대영박물관을 구경하고나서 뮤지컬 표를 사고 공연 시간을 기다리면서 크리스마스 마켓이며 빅뱅이며 템즈강가까지 돌아다녔더니 한 달 걸을 거리를 하루에 다 돈 셈이었다. 게다가 사지도 않으면서 마켓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상점 주인들이 아마 올해 또 가면 기억할지도 모를 정도로. 결국 장식용 철판 두 개 사기를. 런던에서 이런 경험이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는 생각에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은 주체할 수 없는 구매욕을 서로 다독이며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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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때울겸 구경간 중국거리에 있던 애매한 분위기의 중국마켓과 음식점들. 타국 문화가 영국에 와서 특이하게 자리 잡은 것 같은 느낌? 거기 가니 중국인 같은 동양인이 정말 많긴 많더라. 아마 나도 그런 중국인인줄 알았을 지도모른다. 뮤지컬 표살 때는 또 어떻고. 키가 작은 사람은 매표소에서 콧구멍으로 주문해야 할 높이다. 아이가 표사는 동안 머릿속으로 다음에 이거 보려면 어찌해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다. 나 혼자 멋진 유럽여행! 뭐 이런 건 생각하기 싫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꿈을 꾼 듯한 공연을 보고나니 어렸을 때 봤던 메리 포핀스를 언젠간 런던에 와서 꼭 보고 싶다는 생각지도 않았던 목표를 세웠다. 뭐 그 때 되면 어떻게 또 표를 살 수 있겠지.

아이나 나나 감동은 감동이었지만 내발이 내발이 아니었다. 걷는 거 하난 자신 있었는데 걸어도 너무 걸어 다닌 탓에 기진 맥진한 상태로 저녁 늦게 호텔에 왔다. 너무 늦어 또 치약을 못 샀다. 맨 칫솔질과 녹차로 양치질을 하고 중국식당에서 산 아침거리를 냉장고에 넣고 잠이 들었다.

저녁에 대충 찾아는 보았지만 오늘도 아침을 먹으며 당일 치기 여행계획을 했다. 비싸고 먼 동물원은 이번엔 패스.

가깝고 무료인 자연사 박물관이 있으니 거기가자 했는데 한마디로 기대이상 참 잘해 놓았다. 여기도 기부금 통이 여기 저기 놓여 있는데 뭐 조금 잔돈을 넣기는 했지만 샌드위치 사먹는 것도 발발 떨며 먹는 터라 마음이 넉넉하지 못했다. 옆에 길 건너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까지 함께 구경하니 구경 못한 궁전 안이며 그들의 과거 생활상에 대해 아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넓은 전시실 안에서 그림 그리는 남녀노소매니아들은 느긋함과 진실함이 그냥 바로 전해진다. 항상 지금보다 다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내가 여기서 태어나 살고 있다면 그들처럼 살 수 있었을까?

조명과 전시물들의 배열 그리고 장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이게 조화롭다. 조명은 따뜻하고 장소는 넓으나 횡뎅그레 하지 않고 오랫동안 전시되었던 물건 들일텐데도 방금 가져다 놓은 듯 빛이 나고 적당한 인원의 사람들은 바로 전시장이 오픈한 듯 관심 있게 전시물들을 감상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어김없이 샌드위치나 샐러드처럼 생긴 음식을 참 힘들게 고민 끝에 주문했다. 옛 성 안의 일부를 리모델링 해서 식당처럼 사람들이 앉아 식사를 하게 해 놨다. 오래전 여기를 사용했을 과거의 사람들을 상상하며 지금의 사람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으며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눈다니 다음 세대의 누군가도 이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할 것이고 그렇게 세상은 계속 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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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뜨는 날 시간이 좀 있으니 숙소 주변에 있는 작은 궁과 공원에 들려 구경하자고 바쁘게 나가서 근처 공원을 갔는데 백조구경에 빠져서 스페인을 가기위한 공항행 미니버스 타는데까지를 거의 달리다 시피 걸어간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내 가슴까지 오던 백조가 수퍼마켓 백을 알아보고 달려오던 모습을 생각하면 매번 느끼는 건데 ‘새 대가리’란 말 잘못알고 쓰는 말임이 세게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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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슈퍼 총각도 푸근한 런던의 밤거리도 이젠 안녕이다. 우린 스페인으로 간다.

*** 1편 끝 – 다음편에서 계속됩니다. ***

관련 글: 유럽을 듣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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